도사(道士)와 싸워이긴 바둑고수 - 김태현(10회, 한국기원 프로기사 공식 1호)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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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총동창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1건 조회 4,024회 작성일 2018-08-13 12:38본문
대전고 화이팅 !!! (대국일정 미정)
도사(道士)와 싸워이긴 바둑고수 - 김태현(10회) 동문
[배경 - 프로기사 김태현]
프로기사 4단으로 은퇴한 김태현 선생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바둑팬중에서도 아주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현대 바둑의 여명기를 개척한 조남철 선생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기억할 만한 사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태현 선생은 그의 생애에 기사로서의 프로기전 전적보다는 상당히 이채로운 두가지의 공식기록을 남겼는데, 첫 번째는 한국기원 공식 입단1호, 그리고 두번째는 현존하는 최고령 현역 기사로서의 기록이다..
도사(道士)와 싸워이긴 바둑고수 - 김태현(10회) 동문
[배경 - 프로기사 김태현]
프로기사 4단으로 은퇴한 김태현 선생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바둑팬중에서도 아주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현대 바둑의 여명기를 개척한 조남철 선생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기억할 만한 사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태현 선생은 그의 생애에 기사로서의 프로기전 전적보다는 상당히 이채로운 두가지의 공식기록을 남겼는데, 첫 번째는 한국기원 공식 입단1호, 그리고 두번째는 현존하는 최고령 현역 기사로서의 기록이다..
대전고등학교 10회 졸업
은퇴직전, 김태현 四단의 사진이다.
사진을 찍은 장소는 한국기원내 이사장실인듯
-입단1호의 에피소드.
김태현 선생은 1910년생으로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선생보다도 10여년정도 연배가 앞선다. 그런데 김태현 선생이 원래부터 바둑을 평생직업으로 할 뜻이 있었는 가는 정확히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김태현 선생이 참가한 한국기원 1회 입단대회가 열린 그 때, 선생은 대전에 있는 한 학교의 교사로 재직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남, 대전 지역의 국수급 강자로는 분명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기원이 공식적으로 설립된 1954년에 선생은 한국기원으로부터 느닷없이 공문 한장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김태현 선생과 평생을 하게되는 공식적인 바둑인생의 시작이 된다.
김태현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어느날 학교의 교장선생으로부터 공문을 받았는데, 그 공문을 보니 지금껏 별로 들어보지 못했던 '사단법인 한국기원'이라는 곳이 발신인으로 된 입단대회 참가장이었다. 교장선생은 '한국기원이라는 곳에서 공문도 보내주었고 하니 김선생님이 잠깐 자리를 비우고 그 입단대회라는 것에 참여하셔도 좋겠소' 하며 허락을 해주었다고 한다.
-단독참가. 자동입단.
그때가 아마도 54년 10월 경이었을 것이다. 교장선생의 허락으로 몇일의 말미를 얻어, 대회 참가차 서울 한국기원을 방문한 김태현 선생은, 조남철 선생등을 만나고서야 대회참가자가 선생 한분 뿐인 것을 알았다. - 분명 공문을 받고 나서는 대회참가를 위한 마음의 결의와 대회에 대한 설레임이 있었을 건이데. 참가자가 한명 뿐이니 당연히 '자동입단' - 약간 허탈하고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프로기사라는 직업 개념이 아직 생소한데다, 구한말 시대의 老국수들과 어우러져 프로기사와 아마고수들의 구분이 애매모호하고, 바둑의 강자들이 아주 희귀한 시대의 일이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직장생활에서 풀려나 바둑계 인사들을 만나게 된 김태현 선생은 무려 한달(!!)이 넘게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바둑계 인사들과 바둑, 술등으로 날을 지새며 혼자 참가해 자동으로 입단한 아쉬움(?)을 달래다 보니 세월가는 줄을 모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세월을 바둑으로 보내던 그때, 문득 생각나는 것이 두고온 고향의 직장, 김태현 선생은 직장에서 너무 오래 근무 이탈을 한것을 염려하며, 학교에서 쫓겨날 것을 각오하고 일단 학교로 찾아갔다, 어,, 그런데.... 학교를 관장하던 교장선생님은 아무말없이 김태현 선생이 다시 교직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김태현 선생은 나중에 입단대회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서는 '요즘(1998년 IMF)같으면 당시 교장선생처럼 그렇게 스윽~ 못 본 체 이해 해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 하지만 그 때는 사람사는 일이라면 어느정도 이해를 해주었었지. 음..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한달이 넘은 것은 좀 심했지?' 하면서 웃음을 지었었다.
이렇게 해서 학교에서 평화롭게 선생님 생활을 하던 바둑고수 김태현은 한국기원이 공식적으로 주최한 최초의 프로입단대회를 통해 입단한 프로1호를 기록하게 되었다.
- 계룡산 도사(道士)가 나타나 프로 김태현에게 바둑을 청하<다.
[출처 : 조남철 '바둑에 살다'인용]
-道士 출현
김태현 선생이 3단이었던 시절. 김태현 3단은 대전에서 기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프로가 너무 귀하던 시절이니, 당연히 그 지역에서는 내노라하는 국수급 강자가 아니면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기원 원장으로 지내던 어느해 가을, 아주 이상한 차림을 한 계룡산(鷄龍山)의 '신도안'에서 도를 닦던 도인이 기원에 찾아 왔다. 도인은 처음부터 기원 주인을 찾았다. 김태현 3단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기원에 나가 도인을 보았는데. 그는 '내성은 강(康)이며 계룡산에서 20년간 수도하는 여가에 바둑의 이치를 터득했소, 대전에 온 김에 세속의 바둑실력은 어떠한지 시험하러 왔으니, 이곳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두는 사람을 소개해 주시오' 하고 정중히 청하는 것이었다.
-道士 박살
김태현 3단은 일단 호기심이 생겼다. 분명 가소로운 느낌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신도안에는 바둑을 두는 분들이 많습니까?'
-'신도안에는 박도인(朴道人)이란 분이 가장 잘두며 아마 세상 제일 고수일 것입니다. 나는 그분에게 두점을 놓고 상승상부(相承相負)하지요'
결국 김태현 3단은 자기 소개를 하고 도사와 바둑판을 마주 하고 착석했다. 한데 도사가 대뜸 백돌을 자기앞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프로의 입장인 김태현 3단으로서는 저으기 당황스럽고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속세를 떠난 도사에게 프로의 단위와 권위를 말해 무엇하리오. 결국 흑으로 두어나가기 시작했고 기원의 손님들은 원장인 김태현 3단이 흑으로 바둑을 두니 초야의 굉장한 국수가 나타난 것으로 보고 떼로 몰려들어 바둑을 구경했다.
김태현 3단이 바둑을 두어보니 도사의 실력은 9급정도, 그 약한 실력으로 호선으로 프로에게 덤볐으니 결과는 당연히 '반상의 홀로코스트'
참패를 한 도사는 이것은 필시 상제신이 노하여 심안(心眼)을 가린것이 분명하다 며 한동안 눈을 감고 주문을 외더니 재차 도전했다. 그러나 상제신도 바둑을 두려면 기초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상제신의 도움을 받은(?) 도사는 결국 아홉점까지 접히고 말았다.
- 도사의 스승 박도인 복수를 위해 출현. 그러나 역시 박살.
김태현 3단이 가소로운 도사를 바둑으로 박살낸지 얼마후, 박살난 강도사의 스승인 박도사가 김태현 3단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지난번 내 제자인 강도인이 아홉점으로도 졌다고 하니 어찌 이럴수가 있단 말이오. 오늘은 내가 직접 시험하러 일부러 산에서 내려왔소'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김태현 3단은 가소로움을 넘어 귀찮은 생각까지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중하게 대국을 청하는 상대를 기원주인으로서 야박하게 거절할 수는 없는 일. 대국을 시작했지만 전처럼 처음부터 호선으로 시작하지 않고 박도사는 7점을 깔게 했다.
'강씨의 바둑실력은 9급정도이고, 선생께선 두점 강하시다니 일곱점부터 두어봅시다' 라고 청했고 스승 도사는 불만스러웠으나 일곱점을 놓고 대국을 시작했다.
하지만 바둑은 도를 닦는 것이 아니니 어찌하랴. 박도사는 일곱점에 두는 족족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엄청난 고수가 하수를 박살내는 것이 별로 유쾌하지만은 않은것, 김태현 3단은 바둑에 지고 넋이 나가 있는 박도사에게 친절하게 바둑을 복기해주며 바둑의 이론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바둑이란 것은 포석, 정석, 행마란 것이 있으며 이곳은 이렇게 두는 것이 정석, 이 수는 이렇게 두는 것이 행마입니다'
그때서야 박도사는 머리를 끄덕이며
'나는 이제까지 계룡산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는 데 세상은 참으로 넓소, 세상은 참으로 넓어, 헛세상 살았어.' 하며 서글픈 표정으로 떠나갔다.
[도사와 바둑고수와의 에피소드 : IDEA REVIEW]
- 우물안 개구리의 공상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사건의 도사들이 즐겨찾는 상제신(上帝神)도 바둑을 잘 둘 수 없다. 아마 도사들이 했어야 할 일은 바둑이 아니라 세상살이의 길흉을 점치는 다소 모호한 예언분야가 적격이 아니었을 까 한다. 상제신이라면 다소 점(占)이나 예언이 모호하더라도 부족한 부분을 막아줄 든든한 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사들이 착각한 것은 바둑을 무슨 氣나 道로 인식했다는데에 있다. 바둑은 하루아침에 면벽수도하여 도로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실질적인 학습에 의해 실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한 귀퉁이의 정석도 결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닐것인데, 김태현 3단은 도사들과의 실전을 통해 그 현실을 깨우쳐 준 것이고, 도사들은 자신들이 바둑에서 박살이 난 다음에야 몽상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즉 도사들은 바둑으로 도를 닦았다기 보다는 자신둘만의 주관적인 믿음을 계속해서 쌓아나간 것에 불과한 것이다.
도사들의 경우는 현실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즉 도사처럼 속세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나 현상만을 받아들여서 객관적인 진실을 보지 못하는 현상말이다. 왜 사람들은 에피소득의 도사들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받아들여 공상을 확대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하고 즐겁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 유리하거나 옳다고 믿어지는 것만을 보다보면 언젠가 객관적인 현실앞에서 서글픈 표정을 지을 날이 오게 될 것이다.
. 도사들과 김태현 선생의 이야기가 던져주는 메세지는 간단하다. 우물안 개구리의 공상에 빠지지 말것.
자신이 철썩같이 믿고 있는 믿음이 있는가?혹은 상상? 신앙이 아니라면, 그 믿음이 도사들과 같은 유리한 상황만을 학습한 공상인지 혹은 실질적인 꾸준한 학습에 의해 유지되는 것인지 마음에 손을 얹고 가끔씩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주어진 조건에서 유지되던 꿈과 믿음이, 실제 현실에서 산산 조각 날때의 서글픈 표정은 상상만 해도 정말 처량하지 않은가.
[부음]
김태현 선생과는 98년 1월 정도에 같이 점심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건물 밖은 상당히 추운 겨울날씨였는데도 '김태현 할아버지'께서는(=한국기원 사업부내에서 김태현 선생을 지칭하던 애칭^^) 내복을 입지 않으셨었다. 오히려 할아버지께서는 아침에 처음 인사를 드렸을 때도 바지를 걷어 올리시며 내복을 입지 않았음을 자랑하셨다. 그리고 점심을 한국기원 사업부 직원들과 같이 하시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하셨다.
- '아유 대단하십니다. 사범님'(할아버지 진짜 정정하시네..)
-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번도 내복을 입은적이 없어요.' 보라구.
(바지를 쑥 걷어올리시면서.)
- '아유~ 안보여주셔도 믿습니다. 사범님(할아버지~믿어요. ^^;;;)
그리고 양말이나 신발을 신는 습관도 이야기 하셨다.
- '나는 항상 똑바로 서서 양말과 신발을 신는다네. 앉아서 양말등을 신어본적이 없어' 자네들은 이런습관 흉내내지 말게. 글쎄 내 흉내 내느라 양말서서 신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친 사람들도 있었다구. 허허.'
김태현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젊은 사람들과 시간을 같이하게 되니 기분이 좋으셨던가 보다, 여러가지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이날 점심을 같이 하면서 들은 이야기중의 하나가 바로 김태현 선생이 입단하던 때의 에피소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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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 선생은 나이가 드셨어도 허리가 꼿꼿했으며, 말을 하는데 있어서도 발음이 어긋나거나 어물거리는 법이 없었다. 주름도 많지 않았으며 걸음도 빨랐다. 키는 자그마한 편이었고 목소리가 언제나 낭낭했다.
은퇴직전의 김태현 선생은 대회에는 열심히 참여했었으나, 나이가 너무 드셨기 때문에 몸의 건강과는 별도로 좋은 성적을 내실 수 없었다. 대전에서 아침에 기차로 올라오신다음 대부분 점심이 넘기전 혹은 넘고나서라도 금방 예선전에서 떨어지곤 했는데 , 연배가 맞는 기사가 없다보니 항상 외톨이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예선에서 지고 나서 혼자서 다른사람의 대국을 구경하는듯 하다가 ' 나 가네' 하고 한국기원을 부랴부랴 나서는 뒷 모습은 상당히 쓸쓸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선생은 조용한 것에 가깝고, 다른 사람에게 폐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깨끗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한국기원 사업부내에서는 할아버지가 워낙 건강하시고 정정하시니 한 100세 정도까지는 무난히 기사생활을 하실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농담을 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예상과는 반대로 바로 98년도 4월에 은퇴를 하셨다. 그 때 나이 만 88세, 미수(米壽)의 나이였다. 말리는 소리도 있었지만, 본인이 남는 것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라며 듣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한국 현역 최고령 기사의 기록은 88세에서 멈추게 됐다.
그리고 나서 3년이 지난 2001년 9월 15일, 김태현 선생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마 은퇴를 하지 않으셨다면 훨씬 더 오래 사셨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최고령기사의 기록도 훨씬 늘었겠지... 그리고 시간이 있었을 때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도 들고.
아마 하늘나라에 계신 김태현 선생은 그 옛날의 도사들과 다시 만나 정식으로 바둑 한수를 선사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김태현 4단 약력***
1910년 2월 13일 충남 대전 태생
1954년 입단
1990년 四단 승단
1998년 은퇴
1962년 제3기 패왕전 준우승
1960·63년 제2·4기 패왕전 본선
1965년 제6기 최고위전 본선
2001년 9월 15일 별세
은퇴직전, 김태현 四단의 사진이다.
사진을 찍은 장소는 한국기원내 이사장실인듯
-입단1호의 에피소드.
김태현 선생은 1910년생으로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선생보다도 10여년정도 연배가 앞선다. 그런데 김태현 선생이 원래부터 바둑을 평생직업으로 할 뜻이 있었는 가는 정확히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김태현 선생이 참가한 한국기원 1회 입단대회가 열린 그 때, 선생은 대전에 있는 한 학교의 교사로 재직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남, 대전 지역의 국수급 강자로는 분명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기원이 공식적으로 설립된 1954년에 선생은 한국기원으로부터 느닷없이 공문 한장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김태현 선생과 평생을 하게되는 공식적인 바둑인생의 시작이 된다.
김태현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어느날 학교의 교장선생으로부터 공문을 받았는데, 그 공문을 보니 지금껏 별로 들어보지 못했던 '사단법인 한국기원'이라는 곳이 발신인으로 된 입단대회 참가장이었다. 교장선생은 '한국기원이라는 곳에서 공문도 보내주었고 하니 김선생님이 잠깐 자리를 비우고 그 입단대회라는 것에 참여하셔도 좋겠소' 하며 허락을 해주었다고 한다.
-단독참가. 자동입단.
그때가 아마도 54년 10월 경이었을 것이다. 교장선생의 허락으로 몇일의 말미를 얻어, 대회 참가차 서울 한국기원을 방문한 김태현 선생은, 조남철 선생등을 만나고서야 대회참가자가 선생 한분 뿐인 것을 알았다. - 분명 공문을 받고 나서는 대회참가를 위한 마음의 결의와 대회에 대한 설레임이 있었을 건이데. 참가자가 한명 뿐이니 당연히 '자동입단' - 약간 허탈하고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프로기사라는 직업 개념이 아직 생소한데다, 구한말 시대의 老국수들과 어우러져 프로기사와 아마고수들의 구분이 애매모호하고, 바둑의 강자들이 아주 희귀한 시대의 일이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직장생활에서 풀려나 바둑계 인사들을 만나게 된 김태현 선생은 무려 한달(!!)이 넘게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바둑계 인사들과 바둑, 술등으로 날을 지새며 혼자 참가해 자동으로 입단한 아쉬움(?)을 달래다 보니 세월가는 줄을 모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세월을 바둑으로 보내던 그때, 문득 생각나는 것이 두고온 고향의 직장, 김태현 선생은 직장에서 너무 오래 근무 이탈을 한것을 염려하며, 학교에서 쫓겨날 것을 각오하고 일단 학교로 찾아갔다, 어,, 그런데.... 학교를 관장하던 교장선생님은 아무말없이 김태현 선생이 다시 교직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김태현 선생은 나중에 입단대회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서는 '요즘(1998년 IMF)같으면 당시 교장선생처럼 그렇게 스윽~ 못 본 체 이해 해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 하지만 그 때는 사람사는 일이라면 어느정도 이해를 해주었었지. 음..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한달이 넘은 것은 좀 심했지?' 하면서 웃음을 지었었다.
이렇게 해서 학교에서 평화롭게 선생님 생활을 하던 바둑고수 김태현은 한국기원이 공식적으로 주최한 최초의 프로입단대회를 통해 입단한 프로1호를 기록하게 되었다.
- 계룡산 도사(道士)가 나타나 프로 김태현에게 바둑을 청하<다.
[출처 : 조남철 '바둑에 살다'인용]
-道士 출현
김태현 선생이 3단이었던 시절. 김태현 3단은 대전에서 기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프로가 너무 귀하던 시절이니, 당연히 그 지역에서는 내노라하는 국수급 강자가 아니면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기원 원장으로 지내던 어느해 가을, 아주 이상한 차림을 한 계룡산(鷄龍山)의 '신도안'에서 도를 닦던 도인이 기원에 찾아 왔다. 도인은 처음부터 기원 주인을 찾았다. 김태현 3단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기원에 나가 도인을 보았는데. 그는 '내성은 강(康)이며 계룡산에서 20년간 수도하는 여가에 바둑의 이치를 터득했소, 대전에 온 김에 세속의 바둑실력은 어떠한지 시험하러 왔으니, 이곳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두는 사람을 소개해 주시오' 하고 정중히 청하는 것이었다.
-道士 박살
김태현 3단은 일단 호기심이 생겼다. 분명 가소로운 느낌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신도안에는 바둑을 두는 분들이 많습니까?'
-'신도안에는 박도인(朴道人)이란 분이 가장 잘두며 아마 세상 제일 고수일 것입니다. 나는 그분에게 두점을 놓고 상승상부(相承相負)하지요'
결국 김태현 3단은 자기 소개를 하고 도사와 바둑판을 마주 하고 착석했다. 한데 도사가 대뜸 백돌을 자기앞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프로의 입장인 김태현 3단으로서는 저으기 당황스럽고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속세를 떠난 도사에게 프로의 단위와 권위를 말해 무엇하리오. 결국 흑으로 두어나가기 시작했고 기원의 손님들은 원장인 김태현 3단이 흑으로 바둑을 두니 초야의 굉장한 국수가 나타난 것으로 보고 떼로 몰려들어 바둑을 구경했다.
김태현 3단이 바둑을 두어보니 도사의 실력은 9급정도, 그 약한 실력으로 호선으로 프로에게 덤볐으니 결과는 당연히 '반상의 홀로코스트'
참패를 한 도사는 이것은 필시 상제신이 노하여 심안(心眼)을 가린것이 분명하다 며 한동안 눈을 감고 주문을 외더니 재차 도전했다. 그러나 상제신도 바둑을 두려면 기초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상제신의 도움을 받은(?) 도사는 결국 아홉점까지 접히고 말았다.
- 도사의 스승 박도인 복수를 위해 출현. 그러나 역시 박살.
김태현 3단이 가소로운 도사를 바둑으로 박살낸지 얼마후, 박살난 강도사의 스승인 박도사가 김태현 3단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지난번 내 제자인 강도인이 아홉점으로도 졌다고 하니 어찌 이럴수가 있단 말이오. 오늘은 내가 직접 시험하러 일부러 산에서 내려왔소'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김태현 3단은 가소로움을 넘어 귀찮은 생각까지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중하게 대국을 청하는 상대를 기원주인으로서 야박하게 거절할 수는 없는 일. 대국을 시작했지만 전처럼 처음부터 호선으로 시작하지 않고 박도사는 7점을 깔게 했다.
'강씨의 바둑실력은 9급정도이고, 선생께선 두점 강하시다니 일곱점부터 두어봅시다' 라고 청했고 스승 도사는 불만스러웠으나 일곱점을 놓고 대국을 시작했다.
하지만 바둑은 도를 닦는 것이 아니니 어찌하랴. 박도사는 일곱점에 두는 족족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엄청난 고수가 하수를 박살내는 것이 별로 유쾌하지만은 않은것, 김태현 3단은 바둑에 지고 넋이 나가 있는 박도사에게 친절하게 바둑을 복기해주며 바둑의 이론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바둑이란 것은 포석, 정석, 행마란 것이 있으며 이곳은 이렇게 두는 것이 정석, 이 수는 이렇게 두는 것이 행마입니다'
그때서야 박도사는 머리를 끄덕이며
'나는 이제까지 계룡산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는 데 세상은 참으로 넓소, 세상은 참으로 넓어, 헛세상 살았어.' 하며 서글픈 표정으로 떠나갔다.
[도사와 바둑고수와의 에피소드 : IDEA REVIEW]
- 우물안 개구리의 공상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사건의 도사들이 즐겨찾는 상제신(上帝神)도 바둑을 잘 둘 수 없다. 아마 도사들이 했어야 할 일은 바둑이 아니라 세상살이의 길흉을 점치는 다소 모호한 예언분야가 적격이 아니었을 까 한다. 상제신이라면 다소 점(占)이나 예언이 모호하더라도 부족한 부분을 막아줄 든든한 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사들이 착각한 것은 바둑을 무슨 氣나 道로 인식했다는데에 있다. 바둑은 하루아침에 면벽수도하여 도로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실질적인 학습에 의해 실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한 귀퉁이의 정석도 결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닐것인데, 김태현 3단은 도사들과의 실전을 통해 그 현실을 깨우쳐 준 것이고, 도사들은 자신들이 바둑에서 박살이 난 다음에야 몽상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즉 도사들은 바둑으로 도를 닦았다기 보다는 자신둘만의 주관적인 믿음을 계속해서 쌓아나간 것에 불과한 것이다.
도사들의 경우는 현실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즉 도사처럼 속세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나 현상만을 받아들여서 객관적인 진실을 보지 못하는 현상말이다. 왜 사람들은 에피소득의 도사들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받아들여 공상을 확대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하고 즐겁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 유리하거나 옳다고 믿어지는 것만을 보다보면 언젠가 객관적인 현실앞에서 서글픈 표정을 지을 날이 오게 될 것이다.
. 도사들과 김태현 선생의 이야기가 던져주는 메세지는 간단하다. 우물안 개구리의 공상에 빠지지 말것.
자신이 철썩같이 믿고 있는 믿음이 있는가?혹은 상상? 신앙이 아니라면, 그 믿음이 도사들과 같은 유리한 상황만을 학습한 공상인지 혹은 실질적인 꾸준한 학습에 의해 유지되는 것인지 마음에 손을 얹고 가끔씩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주어진 조건에서 유지되던 꿈과 믿음이, 실제 현실에서 산산 조각 날때의 서글픈 표정은 상상만 해도 정말 처량하지 않은가.
[부음]
김태현 선생과는 98년 1월 정도에 같이 점심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건물 밖은 상당히 추운 겨울날씨였는데도 '김태현 할아버지'께서는(=한국기원 사업부내에서 김태현 선생을 지칭하던 애칭^^) 내복을 입지 않으셨었다. 오히려 할아버지께서는 아침에 처음 인사를 드렸을 때도 바지를 걷어 올리시며 내복을 입지 않았음을 자랑하셨다. 그리고 점심을 한국기원 사업부 직원들과 같이 하시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하셨다.
- '아유 대단하십니다. 사범님'(할아버지 진짜 정정하시네..)
-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번도 내복을 입은적이 없어요.' 보라구.
(바지를 쑥 걷어올리시면서.)
- '아유~ 안보여주셔도 믿습니다. 사범님(할아버지~믿어요. ^^;;;)
그리고 양말이나 신발을 신는 습관도 이야기 하셨다.
- '나는 항상 똑바로 서서 양말과 신발을 신는다네. 앉아서 양말등을 신어본적이 없어' 자네들은 이런습관 흉내내지 말게. 글쎄 내 흉내 내느라 양말서서 신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친 사람들도 있었다구. 허허.'
김태현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젊은 사람들과 시간을 같이하게 되니 기분이 좋으셨던가 보다, 여러가지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이날 점심을 같이 하면서 들은 이야기중의 하나가 바로 김태현 선생이 입단하던 때의 에피소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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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 선생은 나이가 드셨어도 허리가 꼿꼿했으며, 말을 하는데 있어서도 발음이 어긋나거나 어물거리는 법이 없었다. 주름도 많지 않았으며 걸음도 빨랐다. 키는 자그마한 편이었고 목소리가 언제나 낭낭했다.
은퇴직전의 김태현 선생은 대회에는 열심히 참여했었으나, 나이가 너무 드셨기 때문에 몸의 건강과는 별도로 좋은 성적을 내실 수 없었다. 대전에서 아침에 기차로 올라오신다음 대부분 점심이 넘기전 혹은 넘고나서라도 금방 예선전에서 떨어지곤 했는데 , 연배가 맞는 기사가 없다보니 항상 외톨이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예선에서 지고 나서 혼자서 다른사람의 대국을 구경하는듯 하다가 ' 나 가네' 하고 한국기원을 부랴부랴 나서는 뒷 모습은 상당히 쓸쓸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선생은 조용한 것에 가깝고, 다른 사람에게 폐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깨끗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한국기원 사업부내에서는 할아버지가 워낙 건강하시고 정정하시니 한 100세 정도까지는 무난히 기사생활을 하실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농담을 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예상과는 반대로 바로 98년도 4월에 은퇴를 하셨다. 그 때 나이 만 88세, 미수(米壽)의 나이였다. 말리는 소리도 있었지만, 본인이 남는 것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라며 듣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한국 현역 최고령 기사의 기록은 88세에서 멈추게 됐다.
그리고 나서 3년이 지난 2001년 9월 15일, 김태현 선생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마 은퇴를 하지 않으셨다면 훨씬 더 오래 사셨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최고령기사의 기록도 훨씬 늘었겠지... 그리고 시간이 있었을 때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도 들고.
아마 하늘나라에 계신 김태현 선생은 그 옛날의 도사들과 다시 만나 정식으로 바둑 한수를 선사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김태현 4단 약력***
1910년 2월 13일 충남 대전 태생
1954년 입단
1990년 四단 승단
1998년 은퇴
1962년 제3기 패왕전 준우승
1960·63년 제2·4기 패왕전 본선
1965년 제6기 최고위전 본선
2001년 9월 15일 별세
댓글목록
한준구님의 댓글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바둑팬 즉,愛棋家 로서
고개숙여 깊이 感謝를 드립니다.
다음에는 가능하다면?
김학수 四段 동문 先輩님 소개 부탁드립니다.